[가정예배 365-9월 24일]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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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내가 참 의지하는 예수’ 86장(통8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22장 1~14절

말씀 :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마 22:1) 마태복음에는 유독 비유로 말씀하신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말씀에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바리새인들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은 항상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는 하늘의 비밀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일 예배 때에 하는 설교와 새벽기도회에 나온 분들에게 하는 설교가 다릅니다. 주일 예배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다양한 분들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갈망해서 오신 새벽기도회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기별을 가감 없이 숨김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7절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들은 ‘오찬을 준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찬이라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마 22:4) 이것은 레위기 3~4장에 나오는 화목제와 속죄제를 의미합니다. 레위기 3~4장에서 제물로 표기된 번제물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보면 제물이 된 모든 동물이 예수님을 표상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6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저희는 밭으로, 또 하나는 상업차로 갔다’고 말합니다. 밭(농사), 상업(돈벌이) 모두 먹고사는 문제라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결국 이 땅에서 먹고 살려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닌데 우리는 항상 눈앞의 현실 때문에 예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합니다. 마치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을 잠시 멈추자 앞의 파도를 보고 바로 바다에 빠졌던 장면처럼 말입니다. 걱정의 파도, 경제적 어려움의 파도, 여러 불화와 두려움의 파도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시야에서 예수님을 놓쳐 버립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거절로 주인은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마 22:9)고 하십니다. 사거리길에 나가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자를 초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마 22:10) 모두가 혼인 잔치 자리에 모였습니다. 초청을 받고 모인 무리는 모두 선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그래서 다양한 인격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그리고 이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품성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복을 심사하는 일은 품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좋지 않은 품성을 가지고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이왕이면 더 좋은 품성으로 천국에 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매일 주님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는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범기 목사(오솔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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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더미션(https://www.themission.co.kr)